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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산책(13) -자문위원 김진흥

2012-07-31 14:08:15
관리자

클래식 음악 산책 (13)

                                           

                                                                    
자문위원  김진흥



프랑스 음악의 자존심 드뷔시와 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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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와 라벨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가장 프랑스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음악세계를 창조한 작곡가이다. 프랑스 음악은 17세기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음악의 거대한 흐름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물론 베를리오즈 같은 음악가가 있었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자존심을 얻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드뷔시는 200 여년 동안 유럽의 미술을 주도해 온 프랑스 미술과 함께 호흡하면서 프랑스 음악의 수준을 끌어 올렸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분위기를 살린 음악을 많이 작곡함으로써 프랑스 음악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또한 저물어 가는 낭만주의에 맞서면서 다가오는 20세기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힘으로써 가장 프랑스 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음악을 만든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라벨 역시 드뷔시의 뒤를 이어 자유롭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창조하였는데 여기에 고전적인 형식미 까지 중시함으로써 한층 아름다운 음악을 선 보였다.

 인상파 음악의 시조, 드뷔시 ( Claude Debussy :1862.8~1918.3 ) 1862822일 프랑스의 근교인 생 제르망 앙레 에서 태어났다. 도자기상을 경영하던 아버지는 드뷔시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도자기상을 그만두고 파리로 이사하였으나 집안 형편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같다

9세 때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드뷔시는 1873 11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된다. 이후 11년 동안 드뷔시는 이곳에서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했다. 1884 22세 때 그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을 작곡하여 로마 대상을 받개된다. “로마 대상이란 프랑스의 젊은 예술가들이 로마에서 공부할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주는 장학금으로 각 예술분야에서 대상이나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이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 드 프랑스로 유학 간 것을 계기가 되어 붙여준 이름이다. 파리음악원 시절이던 1880년 드뷔시는 음악가로서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였던 러시아의 여부호 메크 부인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러시아로 간 드뷔시는 메크 부인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러시아의 작곡가들을 만날수 있었고 부인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바그너의 <트란스탄과 이졸데>를 처음 듣게 되었는데 큰 감명을 받았다. 드뷔시는 로마 대상을 받은 뒤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로마 메리치 궁에서 3년간 머물며 이상적이라고 할만한 조건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였으나 결국 그는 3년 만에 유학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드뷔시는 당시 프랑스 예술계를 물들이고 있던 인상주의를 접하게 된다. 틀에 박힌 음악보다는 자유롭고 참신한 것을 선호했던 드뷔시는 지금까지 음악을 만드는 법칙 즉 조성이나 음계, 대위법의 법칙에서 벗어나 고도의 독창적인 화성체계와 구조를 발전시켰으며 따라서 당대의 새 바람을 일으킨 인상주의 미술과 문학의 새로운 사조인 상징주의 문학이념에 빠져들어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마침내 1894 32세 때 드뷔시는 최초의 인상주의 음악을 세상에 내 놓았다. 말라르메의 시에 곡을 붙인 관현악곡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작곡하였다. 이곡은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이다. 그전 1888년에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 겸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시 <축복 받은 다모젤 (1850)>에 바탕을 둔 <축복 받은 부인>을 작곡 했다. 1902년에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완성하여 초연하였으며 1905년에는 바다의 풍경을 묘사한 관현악곡 <바다>를 작곡했다. 1908년 슈슈라는 별명을 가진 딸을 위하여 피아노곡 <어린이 세계>를 썼으며 1913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전주곡>을 작곡하였고 1919년에는 발레곡 <장난감 상자>를 썼다. 이 외에도 피아노곡으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가운데 <달빛>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실내악곡으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말년까지 작곡가로 연주자로 또 지휘자로 열정을 다 하였으며 1910년 암에 걸렸지만 그는 음악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독일군의 폭격 속에서 56세에 숨을 거두었다.



 다음 라벨에 대하여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 할까 한다.

라벨 ( Maurice Ravel :1875,3~1937,12 )은 프랑스의 생장드뤼 근교의 마을에서 스위스인 아버지와 바스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술적이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어려서부터 라벨이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889 14세 때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 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초기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파리음악원 재학 당시 3번의 시도 끝에 로마작곡대상에서 낙선한 사건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파리음악원 원장 테오도르 뒤비아는 사임하고 그 자리에 라벨에게 작곡을 가르쳤던 가브리엘 포레가 맡게 되었다. 라벨은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는 조성에 기초한 당시의 형식적, 화성적 기존 전통을 벗어나지 않은 작품들을 주로 섰다. 그는 초기의 <물의 유희 :1901>에서 부터 1908 <밤의 가스파르>, 1917 <쿠프랑의 무덤> 그리고 2개의 협주곡 (1931)에 이르기 까지 일련의 걸작들을 작곡했다. 순수한 관현악 작품가운데 <스페인 광시곡> <볼레로>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들은 관현악법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라벨은 러시아 안무가 디아길레프의 발레를 위하여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작곡했으며 그의 유명한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은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대본에 의한 작품이다 그 외 오페라로는 풍자적 내용을 담은 <스페인의 한 때> 1911년에 초연되었다. 가곡 작곡가로서 라벨은 <자연의 역사> <스테판 말라르메의 3편의 시> <샹송 마데카스>등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을 남겼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 사교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 하다시피 지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전선에서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으며 허약한 체질로 1917년 육군에서 제대했다. 1928 4개월 동안 캐나다와 미국 여행길에 올랐으며 같은 해 영국을 방문하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해에는 독창적인 형식의 <볼레로>가 작곡되기도 하였다 라벨의 대표작인 관현악곡 <볼레로 :Bolero>는 주로 연주회용 작품으로 받아드려 지고 있으나 본래 발레음악으로 구상된 것이다. 이 곡은 두개의 주제만을 18회나 전혀 형식을 바꾸지 않고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리듬이나 템포가 바뀌지 않고, 바뀌는 것은 다만 주제를 담당하는 악기의 구성 뿐이라는 것은 거의 음악사상 전무후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은 점점 음량이 커져 마지막의 경우 두 마디에서 정열적으로 분위기가 바뀌면서 끝난다. 이 작품은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초연 되었을 때 열광적인 절찬을 받았고 그 후부터 이 음악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다투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죽기전 마지막 5년간은 실어증에 시달렸다 단 한줄의 음악도 더 이상 작곡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서명할수 없게 되었다. 결국 뇌로 통하는 혈관의 폐색제거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고 1937 12 62세의 나이로 스트라빈스키와 다른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이 지켜보는 가우데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의 즈발루아 공동묘지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