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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조이남 자문위원)

2011-01-27 17:15:00
관리자
 

조이남 자문위원님과의 인터뷰




신묘년 벽두 서설이 내린 날 조 이남 자문위원님을 찾아 뵙고 문안 인사를 드렸습니다.


고문님,   건강유지는 어떻게 하며  운동은 어떤 것을 하는가요 ?


나는 초등학교 입학 후  학교까지의 통학거리가 십리(4km)였으니까 하루에 왕복 8km는 걸어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는 편도6km이니까 왕복 12km를 통학한 셈이지요. 이것은 골프장 을 36홀 다닌 것과 같아서 먼 거리를 통학한 것이 기초체력을 만들어주어 중고등학교를 개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국무총리를 하셨던 변영태 선생이 우리 초등학교(강경중앙)를 방문하여 말씀도 하셨지만 커다란 아령을 들고 교단에 올라와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외국에 출장 갔을 경우에도 아령을 들고 가서 매일 운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당장 아령을 구입하게 되었고 운동 순서표를 안방 벽에 붙여놓고 열심히 아령운동을 하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구나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보디빌딩을 전공한 선생님이 계셔서 체육시간마다 아령을 들고 근육이 움직이는 모양과 어떤 자세로 운동을 하면 어느 근육이 발달한다고 설명하여서 분위기에 휩사여 열심히 아령을 하였습니다. 또한 매년 교내에서 보디빌딩 대회를 시행하는 바람에 전교생이 운동 한가지씩은 기본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그때 시작한 아령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 뒤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생활하면서 사내 동우회와 컴퓨터 산악회 덕 분에 정기적인 산행으로 서울 근교는 물론 멀리 위치한  산에도 많이 다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으로는 원통에서 숙박하고 새벽녘에 설악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대청봉을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인데 눈이 덜 녹아 아이젠을 신고 산행하던 중 무릎 안쪽 근육 통으로 부상이 와서 밤늦도록 어렵게 도움을 받으며 하산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전등 한 개로 앞길을 비취며 여러 사람이 산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산행 시 장비의 중요성과 비상식량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테니스도 자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테니스로 인하여 컴퓨터관련 여러 기관의 CIO들과의 모임도 자주 갖게 되어 많은 교분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사내 동료 중에는 원래 운동이라면 잘하는 분이 있어서 나보고 조 대리는 테니스는 안 될 것이야 라고 하는 바람에 그래 3개월 후에 보자라고 마음먹고 그 당시 나의집이 은평구 갈현동이었기 때문에  연신내에 위치한 테니스코트에 강습을 받기로 하고 매일 새벽 4시 반에 기상하여 자전거를 타고 가서 5시에 테니스 코트장 옆에 위치한 코치선생의 숙소에 가서  잠자는 선생을 여러 번 깨운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였던 덕분에 3개월 후에는 상당한 수준이 되어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동료에게  게임을 하자고 도전을 하여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운동을 아주 잘 하는 것은 타고난 재질과 체력도 좋아야 하지만 일정수준까지는 연습과 노력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회사에서는 테니스 임차코트를 계약하여 주말마다 이용 하였는데, 여의도, 삼송리 등에 위치한 사설 코트를 많이 이용하였고, 지금의 분당에 위치한 도로공사 내에 있는 코트에서도 동우회 모임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테니스 운동 후에는  테니스장 옆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고기 파티를 자주하였는데 그 때의 일들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금융결제원 재직 시절 40대후반(1988년)에 금융망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트레스와 여러 환경의 원인으로 심근경색을 앓은 일이 있었습니다. 치료 후 회복이 늦어지는 바람에 적합한 운동을 찾던 중 단전호흡을 시작하여 열심히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단학선원을 주로 출석하였는데 꽤나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종교적인 부분으로 전환 되는 듯한 행사를 하는 바람에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단전호흡은 운동의 종류 중 좋은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불교의 선을 행하는 내용과 비슷한 것 같으며, 천주교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이 방법을 배워서 기도생활 하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하며 마음을 어떤 명제(화두)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생각과 마음을 한군데 모아 잡념을 없애는 방법이라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될듯합니다. 내 자신도 집중적인 연습을 할 때 밤10시경에 단전호흡을 시행하던 중 새벽4시경까지 몰입한 경험이 있는데 피곤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이란 개념을 초월한 것과 같이 시간개념을  달리 느낄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수영장에도 열심히 다닌 적도 있었는데 잠실 운동장에 위치한  수영장을  5년 정도 다니게 되었고 그 경험으로 수영에 대한 이해와 맥주병 신세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수영을 하면 꾀가 나서 자주 쉬게 되어 운동량이 적어지고, 단체 강습코스에 들어가면 억지로 코스를 쫓아 다녀야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집니다. 수영을 오래한 사람도 강습코스에 들어가야 억지로 운동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금은 주거 단지 안에 있는 피트니스클럽에서 가서  매일 한 시간씩 여러 종류의 기구를 이용한 운동을 하는데, 운동은 마약과 같아서 하루라도 빠지면 신체적 리듬이 깨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합니다..   


  [질문] 대학생시절의 생활에서 잊지목할 추억이 있습니까


[문화의 충격]

  학기 초가되면  대학에 가기위해서는 강경에서 서울까지 호남선 완행열차로 7시간 이상을 기차 속에서  서 있어야 했다는데 그때는 기차의 운행수가 너무 적어  좌석에 앉아서 승차하기도 어려웠고 앉아 있다고 하여도 어른이 승차하면 좌석에 앉아있기가 민망하여 입석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대학 입학했던 1961년도는 6.25전쟁이 발생한지 11년이 지난 시기였으므로 서울 거리에서 화려함은 찾을 수가 없었고 청계천은 개발되지 않은 채 지저분하게 하수구물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신문에 2줄짜리 광고로 “서울사대 수학과 재학 중 가정교사 구함”이라는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를 올렸습니다. 물론 전화를 설치한 집이 적어 전화번호를 빌리는 것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대학의 이름과 학과의 유명도에 따라 가정교사란 알바자리에 희비가 엇갈렸는데 나는 다행히도 잘사는 사장님집이나 지도자급 직위에 있는 집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골 촌놈이 서울의 상류사회의 가정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회사 사장님, 국회의원, 대학교수, 의사선생님 댁과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양장점에도 입주하여 명동생활도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생활경험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가정교사는 건축회사 사장님 댁에서  경기여중 3학년 학생을 가르쳤는데  일주일에 3회 2시간씩 수학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위치는 효자동 청와대 옆 길가에 위치한 집이었는데,  학생 집에 도착하면 매일 보리차를 갖다 주어 마셨느데 지금 생각하니 보리차가 고급의 건강음료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받은 알바이트 비용이 500원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가정교사 3개월되는 달에 알바이트로 벌은 거금 1500원을 주고 스위스제 “튜가리스”라는 상표의 손목시계를 사서 차고 자랑스럽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현금 가치로는 150만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어쨌든 처음으로 내가 노력한 대가로 손목시계를 착용할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전직 국회의원 댁인데 사모님은 숙명여대 가정학과 교수님이셨습니다. 우선 입주 가정교사였기 때문에 그 댁에서 신원보증서를  가져와야한다고 하여 서울사대 학장님의 신원보증서를 발급받아 학생 집에 들고가서 면담을 하였으며, 지도해야할 학생은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가장 일류로 평가되는 덕수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그 댁에서 외아들로 자라나서 애기노릇하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였습니다.  그 댁에서는 선생님 에게  별실독방을 주어 내가 공부하기도 좋았고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 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니 커다란 목욕욕조에 물을 데워놓고 제일먼저 가정교사인 내가 1번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대접을 받은 점도 있지만 지금생각하면 젊음의 氣로 목욕물을 변화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귀가하여 혼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 보는 카레국이 놓여있어 한 수저 먹어보니 쓴맛으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다시 카레가 식탁에 올라왔고 옆에 있는 가족 중 한분이 맛있게 비벼 먹는것을 보고 먹는 방법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최근 무사 앗시리드 라는 저가가 저술한 “사막의별 여행자”(문학의숲,2007.8)를 읽으면서 느낀  아프리카 투아그레족 청년이 프랑스 파리에 유학와서 경험하는 문화의 충격이 내가 서울에 와서 경험한 내용과 흡사 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화여대 초대총장님이셨던 김활란 박사가 유엔총회에 참석차 불란서 파리에서 숙박할 때의 이야기를 수필문으로 본 기억이 나는데 비데를 사용하다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어 다음날 총회출석이 어려웠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모르면 실수는 항상 따라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 할 일들입니다.

세 번째  알바이트는 대학 3학년말 겨울방학에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 두 학생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방학 중 낮에는 학생과 함께  불광동 논뚝을 막아 만든 스케이트장에 가서 원 없이 스케이팅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운동하고 왔기 때문에  밤에는 선생과 제자가 모두 졸고 있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경험으로 지금도 스케이트는 비교적 잘 탄다고 생각합니다. 방학 때 시골에서만 생활하였더라면 어떻게 60년도 초에 스케이팅을 할 수 있었겠는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됩니다.

또 3학년 때는 장춘동에 위치한 서울의대 교수님댁에 입주하여 중3과 중1학년 학생을 가르친 적도 있었는데 그 집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셔보았습니다. 학생 아이들도 맥주를 음료수로 가끔 마셨는데 무슨 맛으로 씁쓰름한 맛을 즐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가 가장 경제적인 삶이 윤택한 집안에 입주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저녁때는 아래층에서 소녀의 기도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와서 정서적인 면에서도 좋았다고 느껴젔으나 가정교사인 내방은 제일 작은 구석진 방을 배정해주어 머슴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게 하는 집이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는 선배가 가르치던 학생을 인수받아 입주 가정교사를 했던 가정이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양장점 사장댁 이었는데 양정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3층이 내가 사용하는 방이었는데 창가로 내려다보면 1층 도로가에는 10여명의 구두를 닥는 젊은이들이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이 보였고, 저녁이 되면 건너편 건물 2층 음식점(화식집)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모양이 커틴사이로 비추어 보였기 때문에 명동의 뒷골목 풍경을 10개월 가까이 보게 되었지요.

그때가 1964년도이니까 12시가 넘으면 통금이 있어 거리를 통행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명동 한복판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프로그램이 바뀌는 명동극장이 있어 자주 영화감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의 혜택을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밤10시경에는 메밀묵을 파는 행상이 “메밀묵사려”를 외쳐대면 양장점 할머님(제일 윗 어른)이 행상을 불러 메밀묵을 사서 동치미 국물에 말아 드셨는데 나는 어쩌다 먹어보면 별맛을 모르겠는데 할머니는 매우 좋아 하셨습니다.

아마도 할머님 고향이 함경도라 옛 추억이 생각나서 즐겁게 드신것 같습니다. 아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는 양장점에서 주문한 코트를 재단하고 나면 짜투리 천이 많이 나오는데 시골에서라면 그 짜투리 천을 연결하면 훌륭한 이불이 될듯한데 그 집에서는 아궁이 불에 모두 태우고 있었습니다.  양장점에는 여자 종업원만 20여명이 있었으나 서울대 교복을 입고 출입하는 나와 종업원들과는 별개의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알바이트를 끝내게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서울대학에 입학한 덕분에 서울에서 가장 상위 클래스에 속하는 집의 가정교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다른 동기생들보다 좋은 경험을 하며 대학생활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독서 생활]

어떤분이 텔레비전 대담의 책 읽는 프로그램에 츨연하여 초등학교 시절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 부럽기도 하고 내가 살아온 세대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약간은 식상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최근 나의 외손자 집에 가서 책장에 꽂여있는 책들을 보느라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책에 있어서는 천국에 살고 있구나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어린이용으로 만든 책이지만 간략한 내용으로 세계문학전집의 축소판은 물론 과학과 예술분야의 책도 방에 꽉 차 있는것을 보며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화로 만든 천자문을 달달 외우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자 쓰기 부분은 만화로 않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최근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은 너무 좋아진 것같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농사짓고 사는 집이어서 집에 있는 서적으로는 아버님이 보시던 한지에 목판으로  인쇄한 동의보감 과 어머님이 겨울철에 읽으시던 붓으로 필사한 옛날 옥루몽과 몇 종류의 이야기책이 전부 였습니다. 그 이야기 책들은 외할머님으로부터 받아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언젠가 시골집에 가보니 필사한 책을 엿장수가 모두 수거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어머님이 눈이 어두워 보실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모두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님이보시던 동의보감 한권만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집에는 나와 아내가 보던 책이 4000여권 정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방에 책장만 있는 셈입니다. 집을 이사할 때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을 버렸는데도 많이 남아있어 언젠가는 몇 권만 남겨놓고 모두 폐기해야 할것 같습니다.


나는 초등학교시절 안중근 의사의 전기를 읽은것 외에는 교과서 이외의 책 을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6.25사변이 발생하여 내가보던 교과서를 다음 학년에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밑줄을 긋는다든가 연필 자욱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교과서 외의 책은 볼 수가 없었고  몇 권의 고등학교 진학용 참고서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교과사 외의 책 예를 들면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 전집 등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도 국어 선생님이 강의시간 중 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어 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녁 주무실 때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으신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책도 볼 수가 없었고 그런 말씀은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임대해주는 책방이 동래에 있어 몇 권의 책은 빌려 볼 수 있었으며 하숙집 옆방에 한국문학전집을 장서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어서 시험 보는 기간이 아니면 그 책을  열심히 빌려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일기 쓰는 습관도 생겼는데 그때는 삼위일체 영어 참고서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그 책을 공부하여 영어로 일기를 쓰는 연습도 하였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영어로 일기 쓰는 것도 중단하여 퇴보하였습니다. 

대학 때는 다양성이 높아져서 통학하는 전철 안에서 월간문학도 구독하였고 사상계도 읽는 등 독서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더구나 나는 전공이 수학이면서 사회학과의 여러 과목을 수강하는 계기가 있어 다양한 독서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종교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면서 종교적 영역의 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함석헌씨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이광수씨의 도산 안창호”등의 책은 나라를 사랑하는 기본 정신을 갖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 나는 금융정보시스템연구회의 조찬 모임에서  도서 추천시간을 갖게 되는데 여러 권 읽은 책 중에서 한권을 추천하게 되어 의무적으로 여러권의 책을 만나게 됩니다.

책을 추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IT 분야의 분들에게 책을 추천하려면 우선 책을 감명 깊게  한나절 만에 책 한권 모두를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철학이 담겨 오래 기억되는 책을 선정해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일로  열심히 여러 권의 책을 선택하여 읽게 되고 나를 책 읽는데 게으르지 않게 하여줍니다. 

    

[질문] 컴퓨터 관련 모임 특히 아이팩과는 어떻게 이연을 갔게 되었나요?

1980년대가 되면서 우리나라 정보통신업계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정보처리요원도 증가되어 기업체마다 전산부서가 생기고 직원들의 위상도 높아져 갔습니다. 그리고 기업체별 정보처리 개발업무가 확대되어  요원들 간의 정보교환이나 애로사항이 발생 할 경우 서로 협조할 필요성이 높아젔습니다.

또한 컴퓨터산악회가 모임을 갖고 정기적인 등반을 하던 중 몇몇 뜻을 같이하던 동우회원들이 정보처리전문가협회가 구성되면 여러 면에서 협조체제도 좋고 정보교환 뿐만 아니라 애로사항도 공동해결이 될 것이라는 생각 하여 전문가 협회 발기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산악회 총무를 담당하던 정남식(대한정보처리학원 ) 회원을 중심으로 노중호(쌍용컴퓨터),박종현(한국통신),노연후(대검찰청),최부일(한국중공업),조이남(지로관리소)등이 만나 실무작업을 진행하였고 발기인에 김길수(국제상사),김진흥(증권전산),유완제(유공),유경희(과학기술정보센터),민경현(경영과컴퓨터),문성렬(대한항공 ),조상치(한국외환은행),한필봉(통계국),황칠봉(화콤코리아)등이 추가로 참석하였으며,  실무 사무는 본인(조이남)이 담당하였습니다.

발기인 대회는 1983년 4월9일 인사동 한정식집(장원)에서 모임을 갖고 윤리강령과 행동지침도 채택하였습니다.

창립총회는 1983년5월10일 정능에 있는 고향산천에서 갖게 되었는데 이때 초대회장으로 노중호씨가 선임되었고 특별히 강조되었던 점은 회원자격 심사위원회를 두어 정보처리 윤리강령을 엄격히 지킬수 있는 상당한 경력을 가진 사람만을 회원으로 입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재정상태는 개인회비로만 운영하기로 하였으므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2대 회장으로 박종현씨가 취임하면서 정부 지원금을 받게 되어 회관을 마련하는 기반 조성을 하여 현재의 홍대입구에 회관이 건축된 것 입니다.  본인은 9대회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정보처리전문가협회는 초창기 앨빈토플러 박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우리나라 정보산업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실무세미나도 개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6월24일을  정보의 날을 정하여 우리나라 정보산업계에 가장공로가 많은 분에게 대상을 주기로 하여 현재까지 진행되고있습니다. 또한 매년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개최하여 소프트웨어 업계의 발전에 기여한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 아이팩 발전을 위한 방법에 관한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아이팩을 창립한지 29년째가 됩니다.  아마 컴퓨터분야의 기술발전 속도로 따진다면 10번이상의 변화를 체험한 셈이지요.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볼때 아이팩의 설립추지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관에 명시된 목적 사업과 관련하여 여러 측면에서  본격적인 활동계획을 가져야 합니다.


[목 적]

본 협회는 정보기술에 관한 발전에 기여하며 회원 상호간의 공동이익과 친목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사업]

1.정보기술에 관한 지식 및 기술의 최신화 사업

2.정보기술의 상호협조 및 정보교환

3.응용기술의 조사연구 및 보급

4. 표준규격 및 조사연구

5.각종세미나 개최 및 발표

6. 국제교류 및 발표

7.회지 및 각종 문헌 발간

8.협회회관 건립 및 임대및 운영관리

9.전 강호 이외의 본협회 목적달성에 필요한사업


가. 정보기술 최신화 및  응용기술에 관한사항(사업1,2,3)

아이팩 회원 전체를 분과위원회에 편성하여 분과위원회별로 최신기술 습득 과 응용에 관한 연구 및 보급에 관하여 협의하는 장이 만들어 져야합니다.

목적사업을 위하여 전문분야 별 모임을 별도로 가져서 정보교환과 응용방법 등을 토론하고 부족한 부분은 전문가를 초빙하여 공동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최신기술을 전공한 전문가를 아이팩 회원으로 영입하는 것도 고려 해야 하며, 연령층과 경력기준으로 제한하는  회원자격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원을 준회원 정회원 법인회원(신설)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관련기관과 협조체제를 갖고 정부가 수행하는 프로젝트의 일부를 수행하는 체제를 갖도록 하여 회원사가 프로젝트수행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나. 각종 세미나 발표, 국제 교류, 회지 및 문헌발간 

전미준에서 결정한 회원소개 책자의 발간, 그리고 국제전시회 및 세미나의 공동 참가 ,학회 등 다른 전문기관(언론사 및 여행사)과의 협력 세미나 시행 등을 시행해야합니다. 예를 들면 정보처리학회와 협조하여 분기마다 전문가협회의 분과위원회에서 연구되고 정리된 내용을 학회와 공동 발행하는 것도  추진해 볼만 합니다. 


다. 협회회관 운영, 기금관리

회관운영과 기금관리를  별도전문위원회 구성하여 앞으로 5년 후또는 10년후의 비젼목표를 을 수립하여  장기적인 사업으로 발전계획을 세우고 추진해야 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전 회원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어 아이팩에 큰 복을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


방문자: 여 호영